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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형편을 제대로 아십니까? (교회의 군중심리 2부) 진리를찾아서

당신의 형편을 제대로 아십니까?

 

 

구원을 잃어버렸지만 주변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완전한 안전감을 느끼고 사는 것,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삶이다.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이다. 깊은 기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3,17). 마지막 시대의 교회인 라오디게아의 교인들은 가장 가난하지만 부자라고 생각하고 가장 부족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며, 벌거벗고 있지만,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놀라운 기만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가난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벌거벗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멀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눈멀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눈을 뜬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군중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결정한다. 목사가 하는 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인다. 죄를 이길 수 없다고 가르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예배드릴 때 손뼉치고 드럼을 치라고 말하면 그대로 따른다. 라오디게아의 군중은 사람의 뜻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 시대의 참된 그리스도인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대로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 마지막 시대의 군중은 다수의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닐 뿐이다. 그들은 라오디게아의 벌판을 떠돌아다니는 들소들이다. 자신이 고민하고 내리는 판단과 양심적 저항이 없다. 구원도 개인적이고 심판도 개인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군중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간다. 그들은 군중 속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다.

 

군중 심리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철저하게 경고를 무시한다. “당신은 부자가 아닙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하고, “당신은 눈이 멀었습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하며, “당신은 옷을 벗고 있습니다.”라는 경고도 무시한다. 그리하여 기만에서 벗어날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누구의 책임인가?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왜 이렇게 완벽한 기만 속에 있을까? 왜냐하면 그들의 형편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한 기별을 침례 요한처럼 곧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옷을 벗고 있고, 눈멀어 있고, 가난하고 헐벗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어서 그 목소리가 군중에 의하여 묻혀버렸다.

 

그런데 왜 실제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경고의 기별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운가? 왜냐하면 군중의 눈총과 압력에 굴복하였기 때문이다. 다수에 속하고자 하는 군중심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군중이 싫어하는 설교는 하지 않고 군중이 싫어하는 가르침은 피해 다니는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기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와 섭리를 통하여 복음을 이해하도록 인도해 주셨고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지만, 당신이 종들은 군중의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다무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딜레마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지도자들을 가리켜 “벙어리 개”라 부르고 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사 56:10).

 

신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를 깊은 기만의 잠에 취하게 한 장본인은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을 무시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십자가 보혈의 피를 값싼 은혜로 만들어 버린 자유주의 복음이다. 세속과 죄에 대하여 승리를 하지 않고도 구원받는 길을 열어 놓은 자유주의 복음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깊은 잠을 자는 것이다. 자유주의 복음을 믿으면 잠을 자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죄를 승리하지 않고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무의미해진다. 그 말씀이 별 의미가 없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바로 잠들게 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기별과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겁한 침묵 때문이다. 소위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침묵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가 깊은 잠에 빠진 원인은 자유주의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제공했지만, 그 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와 원칙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크게 외치지 않고 깨우지 않는 보수주의자들, 바로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진 문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다. 현대 기독교회가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한다.

 

옛 신앙을 지킨다고 말하는 자들이 연어적 특성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지금 현재 기독교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이다.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만 교회를 위하여 말하지 않는 당신의 종들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바로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고민이 아닐까?

 

예레미야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죄와 배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비슷한 설교를 하고 예레미야와 같은 가르침을 가르치기를 두려워했다. 왜 그들은 침묵을 지켰을까? 두려움 때문이었다. 예레미야가 전했던 기별은 예레미야 자신이 만들어낸 기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의 유대교회를 깨우고 개혁하려고 주신 기별이었다.

 

노아가 전했던 기별, 예레미야가 전했던 기별 그리고 침례 요한이 전했던 기별과 같은 말씀이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서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의 눈총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들과 군중으로부터 따돌림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서 경고의 기별이 사라진 이유이다.

 

지금 드리는 이 말씀을 잘 기억하기 바란다. 옛날 유대교회는 예루살렘 성안 사람들의 군중심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메시아를 거절했지만, 마지막 시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군중심리 때문에 성령의 음성이 거절당하고 있다. 노아 시대에 들소 떼가 온 교회와 세상을 뒤덮었을 때 물로 심판하셨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들소 떼들과 펭귄 떼들이 온 교회와 세상을 덮으면 그때 예수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재림하실 것이다. 지금 거의 덮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 51:7, 8).

 

(www.sostv.net 살아남는 이들 114호, 원제:펭귄과 들소 그리고 연어-제2부)